[IT트렌드] 핵폭탄 개발한 미국이 벌벌 떨었던 보안, 실패한 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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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트렌드] 핵폭탄 개발한 미국이 벌벌 떨었던 보안, 실패한 원인은?
  • 오현지 기자
  • 승인 2023.09.28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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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사진: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가 무서운 흥행 가도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에서만 3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영화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일본의 패망, 냉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오펜하이머의 인생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이 영화 속에는 냉전 시대를 앞두고 미국이 소련에게 핵무기 개발 정보를 넘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삽입돼 있어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미국이 보안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아직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지 않았거나 n차 관람을 예정하고 있다면 미국의 보안 시스템 장면을 찾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 때는 한 팀이었던 소련, 미국의 견제 이유는?

1939년 9월 1일에서 1945년 9월 2일까지 일어난 인류의 대재앙,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는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7500만 명에서 8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소련은 독일의 전진을, 미국은 일본의 도발을 막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감수했다. 히틀러의 자살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을 보이기 시작했고,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면서 종전됐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협력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후 세계 패권을 두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제 정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하며 냉전시대가 시작됐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대립하게 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원자폭탄 개발과 관련한 정보를 감추기 위해 철저한 보안 체계를 고심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실패했고, 소련은 미국에 이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안 수준

원자폭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된 곳은 일본이지만, 원자폭탄 자체는 히틀러를 막기 위해 개발이 시작됐다. 미국은 원자폭탁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위해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을 끌어 모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군사 작전이었기 때문에 총책임자는 미 육군 소속의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이 맡았지만, 실질적으로 개발을 주도적으로 지휘한 것은 오펜하이머였다.

당시 미국은 핵무기 개발 기밀을 지키기 위해 많은 보안책을 동원했다.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과학자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 정부가 지은 연구소 내에서만 생활했다. 영화 오펜하이머 속에 나오는 뉴멕시코주의 로스엘러모스 연구소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소였다. 내부에 CCTV를 설치해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

또한 외지인에게 정보가 새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군대가 주둔하며 외부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미국 연방수사국 FBI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관리하며 보안을 책임졌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과학자들의 대화를 감청하거나 전화를 도청하고 편지를 검수하는 등 보안에 신경 썼다. 과학자들이 연구소 밖으로 나가거나 외출하는 것은 철저히 통제됐으며, 외부인과 접촉할 때도 미행해 감시했다.

외부인이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신원을 확인하고 인가와 승인을 받아야 했다. 기밀 정보가 있는 곳은 오직 담당자만 출입할 수 있도록 지문 인식과 안면 인식 시스템 등을 거쳐야 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진 핵폭탄은 '리틀 보이'와 '팻맨'이었는데 이때 사용된 부품과 재료 등을 외부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미국 정부에 의해 안전하게 보관됐다.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미국의 보안 노력은 물거품으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행하며 미국은 과학자들의 변절을 우려했다. 전 세계에서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과학자들을 총동원하다 보니 각양각색의 정치적 사상을 가진 과학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사진: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출처: 유니버셜 픽처스]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이었던 오펜하이머도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는데, 영화 속에서도 정치적 사상을 검증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펜하이머는 '1943년 3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며 소련에 맨해튼 프로젝트 내용을 빼돌렸다'는 의혹에 괴로워했고, 결국 미 원자력 보안 인가 처분 권고 위원회에서 연구소장 연임을 못하게 되는 수모를 겪었다.

에드워트 텔러의 배신, 루이스 스트로스의 개인적 원한으로 벌어진 일명 오펜하이머 청문회로 공산주의자 의혹을 받으며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이슈는 미국과 소련의 격렬한 대립 시기가 투영된 시대적 산물이었다. 

미국은 전후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2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미국이 세계 최초로 원폭탄을 일본에 투하한 후 불과 4년 후인 1949년 소련도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다. 소련이 예상보다 빠르게 핵무기를 개발하자 미국은 비상이 걸린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보안이 뚫렸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훗날 맨해튼 프로젝트에 스파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 독일 출신의 핵물리학자인 클라우스 푹스가 스파이로 드러나면서 영국과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클라우스 푹스는 능력이 출중해 미국이 섭외한 과학자로 자연스럽게 민감한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을 획득했다.

클라우스 푹스가 소련 측에 핵무기 설계 자료를 유출한 것으로 추정됐으며 1949년 9월 영국에서 클라우스 푹스가 연행되면서 만천하에 그의 행적이 드러났다. 클라우스 푹스는 영국에서 구속돼 수감 생활을 했으나 모범수로 가석방되고 이후 동독으로 망명했다. 영화 오펜하이머 속에서도 스파이로 등장한다.

이외에도 맨해튼 프로젝트의 테스트 시험 장비 정보를 유출한 스파이로 테드 활러와 다비드 그리니스가 있으며, 줄리아 로젠버그와 에스더 로젠버그 부부는 스파이 혐의로 미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미국이 군대를 동원해 외부인 유입을 철저히 감시했고 FBI를 동원해 철통 보안에 나섰다 해도 시대적 상황에 의한 정보 유출은 불가피했다고 보고 있다.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과학자 중에는 독일, 소련과 연관된 사람이 많았다. 또한 냉전 시대로 흘러가는 국제 정세 기류를 파악하고 미국과 소련이 동등해야 한다고 믿는 지식인들을 자처한 과학자들이 많았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스파이였던 클라우스 푹스가 대표적인 예다.

 

보안의 핵심은 인력 관리

현대 사회에서도 국가 정보를 해외에 파는 스파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결국 보안을 무너뜨리는 것은 내부 정보의 접근 권한을 가진 담당자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군사 기밀을 외부에 유출한 스파이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당시 육군 특전사 소속 A장교가 북한의 공작원에게 비트코인을 받는 대가로 지역 내 작전계획과 육군 보안 수칙 등 군사 기밀 5건을 유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A장교는 텔레그램으로 북한의 공작원에게 지령을 받아 군사 기밀을 유출했다. A장교가 간첩이 된 동기는 너무나도 허무했다. 인터넷 도박으로 빚에 시달린 상황에서 북한 해커 보리스가 비트코인을 주겠다고 접근해 포섭된 것이다.

A장교는 점점 대범해졌다. 군 전산망을 해킹하기 위해 해킹 장비를 제작하기까지 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당시 최첨단 기술을 동원해 보안에 신경썼어도 내부 스파이로 인해 핵무기 제조 기술이 소련으로 유출된 것처럼 보안을 철저히 해도 내부자의 배신까지 막을 수는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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